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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 사설

근대태권도의 보급과정[배경]

2. 이론적 배경

2.1 태권도의 역사를 보는 두 가지 시각

태권도가 한국의 대표적인 무술이자 세계적인 스포츠로 성장했고 범위가 많이 넓어졌지만 아직까지 이론적 뒷받침과 한국인의 혼과 정신이 담긴 보편적 가치와 의미는 제대로 고양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비대해진 몸집과는 달리 아직 역사적 사실에 기호한 객관적이고도 과학적인 접근이 이루어지지 않아 현재 태권도는 검도와 펜싱같은 관계 같다.

얼핏 보면 공통된 점이 많아 보이지만 확연히 다른 이 두 종목처럼 태권도도 품새와 겨루기가 같은 모체라고 하기에는 다른점이 너무도 많은 것이 현실이다.

검도는 전통적 정신무도임을 강조, 일반인들이 쉽게 할 수 있는 생활체육형태로 급격한 성장을 이루며 전통을 지키는 가닥이지만, 펜싱은 귀족 스포츠로 인식되어 국제경기와 올림픽같은 큰 대회에서만 미디어를 통해 접할 수 있는 종목이다.

장비 또한 새로운 신기술이 계속 개발되며 무선장비와 센서, 투명마스크 등 미래발전방향이다.

이렇듯 태권도도 도장에서는 전통성을 내세우며 인성교육과 도덕교육에 중점을 둔 프로그램위주의 수련방식을 많이 수용하여, , ·단 심사와 관련된 품새중심의 전통성을 강조하고, 학교단체나 팀체제에서의 태권도는 단연 경기겨루기이다. 요즘은 전자몸통보호대 도입 등 장비일체도 고급화 다양화 되어 도장에서의 태권도와는 확연히 다른 것은 부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서로 다르게 발전되다보니 정체성에 대하여 국민과 태권도인은 물론이고 태권도의 연구자조차 혼란을 느낀다.

 

정통적 정신무도강조 스포츠(경기화 +올림픽)

생활체육형태로 급격한 성장 무선장비, 센서, 투명마스크

 

규범의 예, 깨달음의 반복수련 학교, 팀체제 = 스포츠

장비일체의 발전 예)전자몸통보호대

<1> 현대 태권도를 보는 다른 시각

 

정체성문제에 관하여서는 태권도 학 연구자들이 여러 견해가 있으나 대표적으로 전통주의 태권도사관과 사실주의 태권도사관으로 분류가 되어있다.

 

-전통주의 태권도사 : 태권도가 고대 삼국시대부터 발생하여 오늘날까지 전승되었다는 식으로 태권도의 전통성을 홍보하는 입장에서 서술된 태권도 역사. 태권도가 순수 전통무예임을 강조하며 대다수의 태권도 교본류를 비롯한 문헌과 소개 자료에서 보이는 태권도사 기술 방식.

 

-사실주의 태권도사 : 해방시기 가라테의 도입으로 인한 태권도의 발생 등 사실에 기초한 태권도사의 서술 방식. 단순한 사실의 진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태권도가 일본 가라테의 허울을 벗고 한국적 특색을 살린 민족 무예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중시한다.

 

하지만 이런 입장정리에도 불구하고 심승구(2007)는 태권도사의 균형잡힌 연구를 위해서는 첫째, 전근대사기 무술의 역사와 특성에 대한 구체적 자료수집과 체계적인 분석이 요구된다. 둘째, 근대이후 전통무술의 동향과 주변국 근대무술의 유입에 대한 종합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셋째, 해방이후 태권도와 관련된 당시 무술계의 통찰에 대한 증언자료와 함께 문헌고증을 통한 실증적 연구가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분명 태권도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문화유산이고 세계인이 즐기는 무도요 스포츠로 발전되어 국제적 성장과 명성을 가진 올림픽 정식종목이지만 동양의 다양한 무술들의 태권도의 아성에 도전하여 태권도의 위기이자 힘든 시점이다. 실제로 2008년 북경 올림픽에서 중국은 동북공정의 일관으로 태권도의 원조가 중국이라고 주장하며 이런 것들이 태권도의 명예와 발전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 미지수이다. 이는 태권도의 정체성이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음을 예견하는 점이고 역사적이면서도 실증적 과학적 접근을 통해 태권도의 정체성을 정립시켜야 할 것이다.

 

 

1) 전통주의 사관

삼국시대 이후 주변 여러 나라들과의 접촉 속에 수박, 권법, 슈벽, , 사박, 권박, 박히, 택견, 택껸, 슈벽치기, 태권도 등 한국의 전통적 맨손무술의 대표적 명칭들이다. 수박의 전통성을 가지고 오늘날 태껸이나 태권도로 발전되었다는 주장이다.

오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자연 발생적인 무예 연마를 통해 전투기술적요소와 발 중심 겨루기놀이 내지 경기요소, 한민족의 혼과 정신을 담고 있는 정설로서 대한태권도협회 공식견해이자 한국 사학계의 공식적 견해이기도 하다. 서울대학교 신용하교수1)와 인하대학의 민속학자 김광언교수는 태권도는 고유의 전통무술이다라고 보고 있으며 임동건, 정병로, 이창후, 김선풍, 심승구 등 저명한 교수들도 고대로 내려온 조선시대 수박희는 무사의 기본 무예로서 오늘날 현대화되어 태권도가 되었다고 논하고 있다.

또한 일제시대에 발굴된 무용총을 비롯한 고구려 고분벽화, 무예도보통지, 태껸전수자 송덕기옹의 발견 등은 국내외역사가, 체육사학자들도 전통주의사관의 입장을 지지하는 해석이다.

 

삼국시대

고구려의 태권도

고구려는 삼국 중 가장 먼저 고대국가로의 모습을 갖추어 나갔으며 주위의 적인 한족과의 투쟁과정에서 성장, 발달한 관계로 백제, 신라보다 기력이 있고 호전적인 국민성 이었다. 또한 대륙과 접해 있었던 관계로 가장 일찍이 대륙문화를 받아 들였으며 주체적 역량과 자율성을 지닌 왕권국가로 발전해나간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는 그 지리적 위치가 대부분이 큰 산과 깊은 계곡으로 되어 있는 산악지형인 압록강 중류지역으로서 기름진 평야지대로 진출할 수 있는 군사요충지대를 형성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좋은 밭이 없어 힘써 일해도 배를 채울 곡식이 없었다. 따라서 주변국으로부터 무력으로서 필요한 물자를 획득하여야 하는 관계로 강력한 무사집단이 필요하였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고구려의 선배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매세 3, 10신수두대제에 모든 군중을 모아 혹 칼로 춤추며, 혹 활도 쏘며, 혹 꺄금질도 하며, 혹 택권이도 하며, 혹 강수를 깨고 물 속에 들어가 물싸움도 하며, 혹 가무를 연하여 그 미악을 보며, 혹 대수렵을 행하여 그 사획의 다과도 보아 여러 가지의 내기에 승리하는 자를 선배라 칭하고, ‘선배된 이상에는 국가에서 녹을 주어 그 처자를 먹이어 가실에 누가 없게 하고, ‘선배된 자는 각기 대를 나누어 한집에서 자며 한자리에 먹고, 앉으며 고사를 강하거나 학예를 습하거나 하고, 나가면 산수에 탐험하거나 성곽을 쌓거나 도로를 닦거나 군중을 위하여 강습하거나 하여, 일선을 사회와 국가에 바쳐 모든 인고를 사양치 않으며, 그중에서 성행과 학문과 기술이 가장 초월한 자를 뽑아 스승으로 섬기어, 일반의 선배들은 머리를 깎고 백을 허리에 두르고, 그 스승은 백으로 옷을 지어 입으며, 그 스승 중에서 상수는 신크마리’-‘두대형태대형이라 칭하며, 그 다음은 마리’-‘대형이라 칭하며, 최하는 소형이라 칭하고 전쟁이 일면 신크마리가 그 전부의 선배를 모아 스스로 일단을 조직하여 전장에 다달아, 전승치 못하면 전사할 것을 작정하여 죽어 돌아오는 자는 인민들이 이를 개선하는 자와 같이 영행으로 보고, 패퇴하면 이를 타기하므로 선배들이 가장 전장에 용감하며, 고구려 당시에 각종 지위를 거의 골품으로 얻어, 미천한 자가 고위에 오르지 못하나, 오직 선배의 단체는 미천이 없이 학문과 기술로 개인의 지위를 정하는 고로 인물이 그 중에서 가장 많이 출산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고구려의 선배제도는 신라의 화랑제도와 큰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고구려에서는 문과 대등한 무의 위치를 엿볼 수 있고 오히려 무예를 중요시하는 진취적인 상무정신이 더욱 두드러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신라의 태권도

신라의 무예를 말할 때 가장 중점적인 내용이 신라의 화랑도가 수련한 수박, 바로 지금의 태권도이다.

화랑이란 역사적 실체로서 6세기부터 10세기까지 신라에 존재하고 있었던 청소년 단체의 장, 혹은 그 단체 전부를 가리키는 말이다.

화랑도는 처음에는 자기의 마음을 지키려는 뜻에서 시작된 젊은이들의 민간수양단체로서 그 우두머리가 처음에는 여자였으나 후에 화랑이라는 남자 단장으로 바뀌었고 국가적인 편제로 확립된 것은 진흥왕 때의 일로서 귀족 출신의 자제들로만 구성되었는데, 명산 대첩을 순례하면서 인격과 무사도를 수양하였다.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는 삼국가운데서 가장 늦게 고대국가를 형성하고 가장 소국에 놓인 국력으로 한민족 최초로 국토의 통일을 이룩하고 민족 자주성과 주체성을 확립하여 민족문화의 뿌리를 내렸다는 점에서 신라의 화랑은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화랑도의 사상은 삼국사기에 김유신을 따르는 무리를 용화향도라 불렀고 또 진흥왕 때에 혜량을 승통으로 팔관제와 호국인왕경을 강하는 백좌강회를 행한 것으로 보아 미륵신앙과 결부된 호국 불교 사상이었으므로, 그들이 행한 무술이 불상이나 인왕상의 조각에 나타나 있어 오늘날까지도 생생한 자료로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러한 자료는 문헌이상으로 정확하게 당시의 태권을 알려주고 있다.

예를 들면 석굴암 입구의 금강역사상을 보면 그 자세가 현재의 금강 막기 동작과 매우 유사하다. 이러한 것은 이 시대의 불교가 단순한 종교로서가 아니라 호국사상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으므로, 무예를 통하여 호국을 담당하는 무인들의 풍취나 기질이 불교와 영합되면서 여기서 그들의 무술이 불교조각에 등장하게 된 것으로 사료된다.

 

-백제의 태권도

백제에서도 무예가 장려되었다는 것은 말등타기, 궁술, 맨손격투 등이 이 시대의 군인이나 평민들 간에 대단한 인기가 있었다고 전하며 예로부터 팔다리를 둘 다 사용하는 호신술이 있었다고 당시의 기록은 전하고 있다.

심신수련의 방법과 국력증강을 목적으로 태권을 수련했음이 해동운기에서 수벽타를 기록하고 있음에 알 수 있다.

평소에 잘 수련된 수벽타로 서로 겨루는 실전의 싸움이 벌어지니 싸움도 싸움이려니와 이를 성원하는 남녀노소 앞에서 겨루는 장면은 장관이었다. 이 때 무기와 돌은 사용하지 않게 되어 있어 맨손과 맨발에 의한 태권이 사용되었다.

 

 

고려시대

 

삼국시대에 기본동작, 손기술, 발기술로 분화, 발전된 태권은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계승, 발전되었다. 특히 고려는 왕건이 삼국을 통일한 이후 475년간 존속하면서 우리 역사상 상고시대와 근세를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동시에 삼국의 분화를 계승, 발전시키는 중추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웅대한 포부에서 출발한 고려이지만 건국 초부터 북방에는 여진, , 그리고 거란, 은나라와 불편한 관계에 있었고, 남방의 국내에서도 건국초인지라 구세력과 신세력간의 끊임없는 암투로 혼란이 계속되어 태조의 포부를 펼쳐나가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고려 태조 왕건은 무인출신이었지만 고려 왕조는 문치주의를 표방하여 무신은 정치적으로 문신보다 하위에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열세에 놓이게 되어 결국 무신은 천시 받는 존재였고 문신에게 사역되는 존재로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점점 문약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고려의 무예는 무신이 천대받는 것과 관련되어 무예 역시 천시 받았는데 관리 등용시의 문인 과거시험에 무과가 없었고 따라서 서민들이 관리가 되기 위해서는 군인으로 들어가 발탁, 기용되어 무관이 되는 방법밖에 없었으므로 신분이 낮은 서인계급은 거친 무반직에 들어갔으므로 문무 양반은 이와 같이 신분, 문벌상의 차이가 생겨났으며, 무신의 원망이 싹텄던 것이다.

고려사에 보면 태권은 수박, 또는 수박희라 기록하였는데 이 수박희는 무사들의 무예뿐만 아니라 유희적으로 행해졌다고 볼 수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이의민은 수박희를 매우 잘하므로 의종 임금은 이를 사랑하여 대전에서 별장으로 승진시켜 주었다고 하였고 충혜왕 후35월 제사에 상춘정에 행차하여 수박희를 관광하였다. 동교 6월 마암에 행차하여 수박희를 관람하려고 또한 그 다음해 2월에 왕이 매를 동교에서 방하고 화비궁에 돌아와 수박희를 관광하였다고 한다.

당시 천민의 계급에서 출세를 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힘을 가진 자가 수박희를 잘함으로서 왕의 사랑을 받고 크게 출세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고려시대는 왕이 수박희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단순한 관심이 아니라 군인들이 모두 수박희를 대수관목으로 행하여 잘하면 특진을 시킬 만큼 중요시한 무술종목 이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수박희는 기술이 매우 발달하고 군사는 물론 일반인에게까지 널리 보급되었으며 왕이 직접 관람 할 만큼 스포츠적 성격을 띠었고 벼슬과 직결 될 만큼 무인의 필수 무술이 되었다.

전신에서 나오는 위력도 대단하여 사람을 죽이고 벽을 뚫을 만큼 고도의 기술을 지녔고 기술도 오병수박희처럼 실제적 응용을 위주로 하는 집단 후련제가 실시되었음은 특기할 만하다.

발전을 거듭해 오던 태권은 고려조에 이르러 화약이 발명되고 새로운 무기가 등장함에 따라 국가의 제도적 뒷받침이 줄어들기 시작하여 무예적 비중이 줄어든 반면 민속 경기로서의 기틀을 마련하여 갔다.

 

 

조선시대

 

조선은 태조 이성계가 왕조를 세웠으나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들어선 것은 커다란 사회의 변혁으로 된 것은 아니며 다만 왕권이 교체된 의미만을 지니는 것으로서 고려의 문물제도를 그대로 이어받아 서서히 개혁되어 갔으나 불교만큼은 고려시대에 승불제도에 발생된 많은 폐단으로 억불정책을 써 유교의 전성기를 이루게 되었다.

조선은 유림들에 의한 극단적인 문약정치로 말미암아 무관의 사기는 저하되고 무예 또한 저조를 면치 못하여 무사나 일반국민들의 기상은 대체적으로 안일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서 전쟁 등을 통해 무예와 권법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주목할 만큼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무예적 연구에 대한 것들 중 많이 듣게 되는 것이 무예도보통지이다. 무예도보통지는 선조, 영조, 정조의 3대에 걸쳐 증보되고 완성된 책이다.

고려시대에 활발한 모습이었던 수박은 무풍을 무시한 관계로 무신사회에서 보다는 일반 대중적인 유희 오락 경기로 발전해 갔다. 태권도를 포함한 무예는 국권을 수호하여 국가의 흥륭에 기여하는 목적으로 수행되어 왔으며 민족 주체의식 풍조가 풍미하는 동안 무술은 비록 쇠퇴하였으나 민중, 서민의 생활 속에 그 명맥이 유지되어 왔던 것이다.

조선시대 수박이나 무술을 행한 기록은 담양의 향리, 관노 등이 국가에서 수박희로 시험본다는 소문을 듣고 여럿이서 모여 수박희를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고 태종 167월에 상황의 탄신을 맞이하여 세자 및 종친들이 연회할 때 갑사 및 방패군을 정으로 각투케 하고, 또 수박희를 하게 하여 보았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그러나 나라의 기틀이 잡혀 인정을 찾게 되고 군대 조직이 정비되면서 화약의 발명과 새로운 무기의 사용으로 수박희에 대한 제도적인 뒷받침은 사라지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다른 무예도 경시되었으며 위정자들은 문치와 당쟁에 휘말리고 선비들은 무예를 무시하고 무관심하다가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은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군제를 재정비하고 창, , 검 등의 고대적 무기 외에 화포, 대통, 창술, 태껸(권법) 등 무예를 일정한 방침 밑에 체계적으로 훈련하기 시작하였다. 서울에는 훈련도감을 두고 5부의 장정을 뽑아 무예를 가르쳤으며 지방에는 호관 또는 속오군이란 것을 두어 군사기술을 가르쳤다. 또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정조 때 이르러서는 무관을 양성하기위해 무과를 두어 평소 군사훈련과 무예수련을 장려하였으며 이덕무, 박제가 등을 시켜 무예도보통지란 무예서를 만들었는데 이 무예도보통지 제 4권에 권법이 나오는데 권법은 바로 태권의 품새와 동작을 싣고 있으며 기효선시, 무편, 내가권법 등 중국서적을 참고한 관계로 중국의 용어를 그대로 빌어 쓴 단점이 있다.

 

 

일제시대

 

일제시대는 1910829일 한일합방 후부터 1945815일까지를 말하는데 우리 민족은 일제의 압박 밑에서 갖은 고충을 겪어야 했으며 우리 민족정신 말살에 혈안이 되었던 만큼 모든 부분에 차별을 가했으며 이에 따라 우리의 전통 무예들도 압박을 받게 되었다.

몇몇 무예사범들이 비밀리에 그 기술을 연마하고 가르쳤으며 이런 지하 움직임을 통해서, 그리고 각 지역 사회에서 개인적, 혹은 또래 집단들이 놀이나 기타 비전무술 등의 형태로 한국의 무예는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며 긴 세월 전국적으로 산재되어있던 태껸 등의 한국 전통 무술들이 쉽게 사라지지 않고 이처럼 여러 경로로 면면히 지속되어 온 것은 문화인류학적으로 볼 때도 매우 자연스런 현상이라 볼 수 있었다.

고로 이 시기에 일본의 가라테와 중국의 권법, 기타 무예의 형(품새)과 단급 체계, 관등의 행정 체계 등이 소개되었고 발기술 위주의 한국 무예의 형태에 이러한 외국기술들(주로 손 기술)과 수련, 행정 체계 들이 발전적으로 첨가되었다.

이처럼 수박도 및 태껸 등 전통 무술들을 기본으로 하고 중국의 소림사 무술과 일본의 가라테에서 뽑은 기수를 추가하여 혼합형(품새)을 발전시켰고 이 새로운 무술 조직들은 수박, 태껸, 태수, 태권, 찐따오, 권법, 공수도, 당수도 라고 불렀다. 일제는 우리 민족의식을 빼앗고 모든 문화를 말살하여 소위 충량한 황국신민으로 만들어 노예적이고 맹목적이며 무기력한 인간을 요구하는 신민지 교육의 탄압 상을 보였고 태권도도 전통적 무술로서 민족정신을 말살시키려는 잔혹성 때문에 금지가 되었다. 이처럼 태권도는 일제의 불법 통치라는 특수한 시대 상황으로 인해 다른 모든 분야가 그러 했듯, 일본(가라테)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으나 그 명맥은 꾸준히 유지해 왔던 것이다.

도산 안창호선생도 태껸(태권도)을 민족무술로써 인정하고 이를 장려하였으며 종래의 지, , 체 교육을 덕, , 3대 교육으로 덕이 없는 인간의 지식은 악용되고, 몸이 건강하지 못한 자에게는 자식이 다만 불평불만의 시가 되기 쉽다고 지적하며 체육을 강조하였다.

황국신민통치기에 있어서는 대륙침략의 야욕이 노골적으로 본격화되어 국내 무도단체 및 도장들이 강도관 조선지부로 강제 편입되었는데 이러한 작업은 일본에 의한 내선일체라는 명분이었다.

신용하교수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태권도가 일제시대의 외압에 의해 의도적으로 가라테가 확산되면서 형(품새)이 태권도에 도입되었으나, 그 핵심은 태껸이였다라고 전통주의에 큰 힘을 실어주고 전통주의사관의 신흥세력 이창후1)는 그의 저서 태권도의 철학원리에서 태권도는 세계화에 성공한 가장 대표적인 한국의 문화유산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태권도라는 말로써 의미하는 것은 한국의 전통무예에 가깝다. 그 고유한 전통무예는 일제시대 속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우리 속에 살아 있었으며 한편으로는 정치적 강압 때문에 가라테의 옷을 빌려 입기도 했음에 틀림없다.”라고 주장한다.

이렇듯 정통주의의 핵심은 한반도에서 자연발생하여 삼국시대의 수박, 고려시대에 수박희로 행해지다가 조선중기의 권법에서 말기로 넘어가 태껸으로 전승되어 현재의 태권도가 되었다는 사관이다.

 

 

 

2) 사실주의사관

태권도는 대한민국 고유의 전통무예로서 시대별로 역사적 증거와 함께 삼국시대에는 수박, 고려시대에는 수박희, 조선의 권법으로 변천되어 조선말기에 태껸으로 전승되어 현대의 태권도가 되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하지만 80년대 후반 태권도 신진학자인 양진방에 의해 최초로 가라테유입사실이 발표됨으로서 그 이후 유명한 철학자인 도올 김용옥의 저서로 인해 일반인에게 확산되었다. (송형석)

양진방은 기존의 태권도사가 사실성이 부족하고, 역사적 의미가 없으며 고립적이며 폐쇄적이다. 그리고 내용이 추상적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김용옥은 대한민국에는 태권도가 없다. 우리가 태권도라고 부르는 모든 무술의 조형은 완벽하게 메이드 인 재펜이다. 이사실에 대해 추호도 거짓말도 있을 수 없다!”라고 노골적인 사실주의즘을 펼쳐냈다.

먼저 이런 비판들은 역사는 진실을 바탕으로 논쟁을 잠재우자는 입장이다. 중국무술 같은 경우에도 너무나 허구적인 활약상을 과시하며 천 종류이상의 무술관계 서적이 간행되고 있지만 90%이상이 진실이 아니라는 점이다. 소림권의 창시자이자 중국무술의 시조로 알려진 달마대사도 후세사람들이 만들어진 허구로 밝혀졌고 이런 영웅과 위인으로 날조된 사례들을 배척하는 것이 태권도 발전에 희망이라는 학술적 견해이다.

먼저 사실주의사관의 대표적 인물로 양진방의 서술로 간략하게 다음과 같다.

태권도는 태권도가 가라테의 유입으로 인하여 발생한 것으로서 가라테의 유입은 1945년 해방과 함께 일어났으며 유입 담당자들은 일본에서 당수를 수련한 유학생들이었다.

근대 태권도의 지도자들은 유입한 가라테와 전통 무술을 종합하여 근대 태권을 형성시켰다고 주장했지만 이것은 사실과는 다른 것으로서 당시의 지도자들은 유입한 가라테로서만 보급시켰으며 그 이후로도 전통 무술이 기술적으로 통합된 적은 없었다.

1950년대에 이르자 지도자들은 유입한 당수를 한국화 시켜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본격적인 노력을 쏟기 시작했다.

이러한 노력은 명칭의 개정, 기술의 변천, 기술용어의 변천, 그리고 역사의 정립 등으로 나타났다. 그 결과로 태권도란 명칭이 나타나서 정착되었으며 기술적으로는 새로운 형 체계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외형적으로 가라테와 다른 태권도의 모습을 가지게 했을 뿐 실질적인 자기화나 근본적으로 당수를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이 과정 중에는 전통 무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지도 못했으며 새로운 기술의 개발도 없었다. 외면적으로는 가라테를 부정하면서도 결과적으로는 그것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한 것이다.

1963년부터 본격화된 경기화는 한국 태권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는데 경기는 호구를 착용한 상태에서 타격하는 방식이 선택되었다. 경기를 통한 중요한 변화는 손기술 중심에서 발기술 중심의 무술로, (품새)이나 단련을 위주로 하던 독습 방식에서 겨루기 중심의 대인연습 방법으로 전환되었으며 이란한 변화 속에서 차기 기술이 고로 발전되었다. 이러한 경기 태권도를 통한 변화들은 전체 태권도에 확산되면서 한국 태권도의 발전을 선도해 가게 되었다. 경기태권의 발전을 통해서 한국 태권도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전통무술인 태껸과 기술적으로, 성격적으로 어느 정도 동질성을 가질 수 있었던 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앞으로 전통무술과 현재의 태권도와의 접합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유입된 가라테를 발전적으로 극복해 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1960년대의 1차 세계화의 단계에서는 가라테의 형태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수준의 근대태권이 해외에 보급되었지만 70년대의 2차 세계화의 과정에서는 경기태권이 그 중심이 되었다. 이보다 앞서 있는 국내에서의 약 10년간의 상당한 발전이 70년대의 경기를 중심으로 한 태권도의 세계화를 가능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근대태권이 중심이 된 1차 단계에서는 일본의 공수와 분명하게 구별되지 않음으로 해서 외국에서 가라테 또는 코리안 가라테라고 불리위지기도 하였으나 경기태권을 중심으로 한 2차 단계에서는 일본의 가라테와 분명하게 구별되는 것뿐만 아니라 가라테보다 기술적으로 우수하며 스포츠로서 보다 세련된 수준의 것으로 한국 태권도를 세계에 인식시켜 줄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태권도의 역사 속에서 있는 유입된 일본 가라테의 잔재를 극복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세계화의 과정 속에서 경쟁하고 있는 오늘날의 가라테를 이겨내기 위해서도 경기태권과 이를 통한 참다운 태권도의 한국화가 중요하다(양진방).

 

 

 

 

시기 태권도의 발생 과정
삼국시대 ←────중국 한 나라(?)
(병수, 변 등 다른 이름)

수박희 오병 수박희

(연산군 시대에 기록에서 자취를 감춤)

↓             권법←──중국 명나라
?   ? ────※               ←──근원미상
│ │                             
오키나와테, 스모, 유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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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                                 
라                                 
테                                 
└──────────→태권도
고려시대
조선시대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

사실주의사관을 근거로 한 태권도의 발생과정

 

 

3) 양자의 종합적 입장

태권도의 정체성을 재확립하여 역사적 사실을 인정해서 가라테의 도입이 실제 인정된다 치더라도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판단된다.

태권도는 한민족 특유의 경기방식으로 탄생, 또는 변화되었고 국제 스포츠경기로서 계속적인 발전이 되어왔다. 가라테의 수련목적과 검도의 원리가 내존해 있지만 그것역시 조선조 500여 년 동안 우리민족의 정서가 서려있던 유교정신이 있어서 일제식민시대의 가라테 영향을 받았지만 비슷한 격식과 제례와 예의가 인정된다는게 본 연구자의 주장이다.

또한 50년대에 태권도라는 명칭의 등장 이후만을 태권도사로 보고 이전역사는 태권도사가 아닌 무예사로 보자는 것은 대한민국 명칭 성립이전의 역사는 한국사가 아닌 동아시아 또는 세계사의 일부로만 보자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점이다.(최영렬, 전정우)

지금 태권도는 날렵한 몸동작을 주사하는 다이나믹한 분위기, 극단적 위력 보다는 빠르기와 난이도를 중시하는 기술관, 정신의 긴장을 최소화한 상태에서 순간적인 힘의 집중에 관한 타격원리, 상대와 직접 겨루며 축제형식의 경기적 성격, 자타공영의 현대 스포츠정신의 구현 등(송형석) 모든 타 무술과 달라진 전반적 차이점이 있다.

또한 태껸과의 언어적·기술적·문화사상적 상관성을 맺고 있으며 한국의 대표적 맨손 무예로서 한민족 무예기질을 함축한 현대 격투 스포츠공인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