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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 사설

유교와 무예

고려시대는 무인시대였다. 무도나 무인이 가장 우세한 위치에 있었고 무사들은 많은 특권과 권력을 누렸었다.

하지만 양반관료제의 조선시대에 와서는 문치주의 하에 이루어진 유교교육의 강조로 군사학은 중요하게 취급되지 못했다. 조선의 통치자들은 명예의 소수독점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무신들이 관료의 지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통치자로서의 명예를 나누어 주는데 인색하였다.

 

조선시대에 서반인 무신들은 동반인 문신들과 동렬을 이루며 양반제도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문신들은 무신들을 차별하여 무신들이 통치자로서의 명예를 갖는 것을 방해하였다. 이를 위해 문신들은 종2품 이상의 무반은 독자적 품계를 갖지 못하도록 해 고위급 무신들은 문반의 품계를 받아야 했다. 또한 무반의 최고 위직인 관직을 문신이 겸임 또는 겸대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병정기관인 병조의 관원도 문신이 독점하였다.

 

또한 문신들은 의학· 산학· 역학 등을 가르치는 기술학교는 설치하면서도 무신들을 양성하기 위한 무관학교는 설치하지 않았다. 무신들은 무관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병법과 무예에 대한 체계적인 학습이 어려웠고, 스승으로서의 공식적 명예도 가질 수 없었다. 중종대에 관리를 훈련원에 파견하여 무사들을 교육시킬 때에도 교수를 문신으로 파견하였다. 이 때문에 무신들은 무신으로서의 긍지를 갖기 어려웠다. 따라서 무신들 중에는 나라가 태평이라 무신을 버리시니, 나 같은 영웅은 북새에 다 늙거다. 아마도 위국정충은 나뿐인가 하노라고 신세를 한탄하는 이들도 생겨나게 되었다. 이런 관계로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자제들에게 유학을 전문으로 가르쳐 문신으로 진출시키려고 하였다. 이로 인해 무신들의 가문적 전통마저 유지되기 어려워 능력을 갖춘 무신의 배출이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다. 그 결과 무신들의 사기가 떨어져 국방력의 저하를 초래하게 되었다. 아직까지도 이런 뿌리깊은 유교사상은 현재 사회에도 깊은 영향을 끼친다. 지폐만 보더라도 율곡이이, 퇴계이황 등 유학자들만 배경인물로 나오고 역사적 주요 무인들은 거론조차 되지 않는 실정이다.

 

우리가 아직도 당연하게 여기면서 사용할 제의, 의식, 예식, 제례, 제사 등은 사로 연결되면서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예 개념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제기되어야한다. 지금도 태권도 도장에서 수련생들에게 제일먼저 인식시키는 것이 인사하는 방법이며, 예의범절이며 인격수양, 도덕교육이 수련의 목적이다.

 

전통적인 예의와 절도있는 동작, 매너리즘을 배우기 위해 학부모들은 아이들을 태권도장에 보낸다. 태권도장뿐아니라 유사무술인 합기도와 검도도 무조건적인 예의를 첫 번째 수련계획수단으로 본다.

조선은 선비의 나라다라는 대표적인 말이 있듯이 삼강오륜과 관혼상제는 유교의 대명사이다.

 

군위신강 - 임금과 신하
부위자강 - 어버이와 자식
부위부강 - 남편과 아내

상하가 철저한 절대적이고, 일방적인 윤리

 

인,의,예,지,신

오륜 : 상하관계의 질서의 확립

봉건적 신분질서를 유지하는

지배층의 통치이념.

 

태권도의 수련 상 10계 신조

1. 나라에 충성 6. 사제지간 의리

2. 부모에 효도 7. 친우간의 믿음

3. 부모의 애정 8. 살생분별

4. 형제지간 상협 9. 임전무퇴

5. 노소지간 경보 10. 실천필부

 

 

예와의 중시, 상하질서의 강조, 충성심이나 애국심같은 가치의 강조 등에서 무도에 대한 유교적 사상의 영향을 쉽게 엿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 가장 유력한 동양사상으로서 동양인의 삶과 가치관을 형성해 온 유교가 무도수련의 가치관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을 것이라는 가정은 자연스러운 것이라 할 수 있다.(스티븐 캐페너))

 

우리나라가 조선 500년 동안 숭상해온 유교사상이 일제식민 36년을 거치면서 이제 겨우 60여년이 흘렀을 뿐이다.

아직까지 많은 한국인들은 이러한 유교이념을 갖고 살아가고 있으며 식민지시대 와서 일본무술(카라테)의 영향으로 이런 무도사상이 태권도품새에서는 더욱 계승되고 발전되어온 것이다.

스티븐 캐페너도쿠가와시대의 유교는 무사들의 정신적 교양임과 동시에 일상생활에 복잡하게 의식화된 예의범절을 강조함으로써 그들의 생활과 행위의 계율적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유교의 영향은 무도수련에 중요한 몇 가지 변화를 직·간접적으로 야기시켰다. 이러한 형식화와 의식화는 먼저 복잡한 예의와 의식의 강화로 그리고 기술적으로 형이나 본제정과 이러한 본과 형의 중심으로 인한 수련양식의 유행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일본은 군국주의와 국수주의를 위해 무도유교사상을 철저히 이용하였으며 그 사상에 익숙한 한국인들은 자연스레 일본무도를 접하고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다.

 

 

송형석은 일본무술의 분위기를 짙게 풍기기 시작한 가라테가 광복을 전후해서 우리나라에 유입되었을 때 이미 36년 동안 일본무도교육에 익숙해져있던 우리 조선인들이 정서적으로 그것을 거부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이렇듯 우리의 예전통사상과 일본의 무도사상이 비슷한 개념을 갖고 있어서 현대적의미에서 볼 때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가라테의 유입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민족의 정서, 전통사상, 그 가치관을 정립시킨 기회가 아닌가 평가할 수 있다.

 

 

 

1) 조선의 유교 : 선비사상과 예

원나라에서 정통의 지위를 확보한 주자학은 고려말부터 전래되어서 조선의 건국이념으로 채택되었다. 이후 500년 동안 조선사회를 이끄는 사상적 원동력이 되었다. 더 깊이 흘러가면 한자문화권에서 수천년 동안 주류를 이루었던 종교이고 철학이다. 조선시대에 와서 이런 선비문화체제가 이루어지고 예의와 염치의 규범문화로 자리잡는다. 여기에서 선비란 유교이념인 도를 실현하는 인격적 주체이고 군자라는 호칭으로 결합될 정도로 칭송받는다. 아울러 선비는 모든 사람에게 있어 학식과 덕망을 두루갖춘 인물에게 존경의 대상이요 지도자로서의 역할수행과 공경의 대상 그 자체였다.

 

윤사순은 선비는 유교의 이상적 인간상이다” “신라의 화랑은 선비의 전형적 인간상이다라고 주장하고 선비가 유교이념을 계승하고 정립하며 사회에 실현하는 주체라고 말한다. 결국 조선사회는 이들의 공동체가 선비의례를 제정, 강화, 결속하여 유교사회를 만들고 이끌었던 것이다. 또 이들의 문화는 예의문화와 염치문화로 통한다.

 

예의문화는 행동의 절차를 엄격한 형식에 따른 의례로 규정하고 엄숙함과 절도있는 자세와 예의바르지 않는 일을 부끄럽게 여기는 염치문화로 계승시킨다. 염치는 탐욕과 자신의 이기심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다.

 

예의와 염치를 바탕으로 하는 선비문화는 나와 남이 조화롭게 어울려 이루는 공동체의 문화이며, 절차의 형식과 엄숙한 태도를 중시하는 특징을 갖는다. 조선의 선비는 일상생활 속에서예의로 행동을 규제하고 염치로 마음을 단속하고 예의와 염치가 매우 중요한 평가기준이었다.

 

그리고 효는 생명의 근본에 대한 보답으로 여겨 부모의 은덕은 무엇으로도 갚지 못할 만큼 크고 높은 것으로 생각한다. 자식은 몸이 가루가 되도록 부모를 섬겨야하며 부모와 나를 구분하지 않고, 1차적으로 나를 있게 해준 생명의 연장된 존재라 규정한다.

 

 

율곡이이의 성학집요

준 은혜는 하늘도 이보다 지극할 수 없다. 젖먹이도 부모를 사랑할 줄 아는 것은 천성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다만 사욕에 가려서 그 본심을 잃게 됨으로써 부모가 물려주신 몸이 자기를 위해서 있는 것인 줄 알고, 부자의 사이를 구분하여 낳고 기른 수고를 생각하지 아니하며, 다만 일시적인 은혜가 적은 것을 원망하게 된다. 몸은 나의 소유가 (자식의 몸은 부모가 낳아주신 것이기 때문에 혈육과 성명을 모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낳아주고 길러 아니고 바로 부모의 수유다. 남에게 물건을 주어도 역시 감격할 줄 알 것인데 하물며 몸을 물려주신 부모에게야! 힘을 다하고 목숨이 그치도록 노력하여도 족히 은혜를 보답할 수 없다.)

 

이처럼 선비들에게 나의 소유가 아니었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가 어떠한 상황이라도 일촌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서로가 생명으로 동일 시 되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조선시대에는 정치·경제·교육·문화 등 모든 분야가 유교이념에 입각하여 조직 운영되었고 인성의 인의, 실천윤리의 호제충신과 삼강오륜, 종교와 의례에 있어 삼강오륜, 종교와 의례에 있어 가묘와 관혼상제, 국가체제에 있어 사농공상적 신분질서와 양반관료제등이 유교이념에 기초를 두고 있다.

조선시대에 유교는 특히 이학이라는 이름으로 재구성된 새로운 형태의 유교이다. 이학의 출발은 태극도이고 태극 속에서 음과 양이 분화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유교의 세계관으로 보면

 

태극 음양 오행

태극 이기

이일 분수

일리 만물

일통 만수 의 논리체계이다.

 

사물을 분화, 발생시키는 최초의 원인은 무극으로서의 태극이 있고 그것은 시원의 이와 기를 포함한다. 이때 시원의 이는 이치로서 운동의 원리를 말하고 시원의 기는 음양으로서의 운동의 재질을 말한다. 그래서 운동의 이와 운동의 기가 결합됨으로서 최초의 운동이 발생되며 이 태극에서 비롯된 시원의 이원 시원의 기가 근거하여 운동하면, 음과 양이 분화되는 것으로 시작되며 태극에서 분화된 최초의 양과 음은 성숙하며 변화하여 최초의 오행(····)을 발생한다.

이 오행들은 음양적 결합의 과정을 통해 건도와 곤도를 성립시키고 도로써 만물을 생성시키는 재질이 된다. , 태극속의 이치는 오행을 통해 전치만물로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최봉영이 말하는 통체 - 부분자적 세계관에 근거하고 있는 유교의 통치이념이다.

퇴계이황, 율곡이이 등 조선성리학자들은 인간존재는 이와 기의 두 특성이 결합함으로서 이뤄져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퇴계가 말하는 이란 본인의 성이고 도심이며 천리의 보편성이다.

 

이기론 - 도심과 인심으로 구분.

도심 - 천리로서 인간을 포함한 만물의 본성.

- 생각 또는 자각. 앎의 과정은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며 지혜를 실현하는 과정.

지혜 - ··예 앎의 궁극적 목표는 실천의도임(이경명).

이렇게 이학의 형태로 발생된 유교사회에서는 기본적 규범체계로서 인륜을 확인하고 정립시킨다. 부모와 자식, 임금과 신하, 남편과 아내, 어른과 젊은이, 친구사이 등 인간관례의 기본을 제시하고 확립시켜나간다. 또한 삼강은 국가 통치원리로 확립시키고 삼강오륜은 불변의 규범으로 적응시켜 삶의 기준으로 삼았다.(금장태)

 

 

2) 유교와 한국 전통무예

조선 500년의 처음과 끝이 유교였고, 조선이 번성하며 긴 역사를 가지고 있었지만, 1905년 외교적 자주권을 잃고 본격적인 일본의 식민화과정을 밟게 된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병합한 후 조선의 멸망은 유교 때문에 초대됐다는 주장이 지식인들 사이에 퍼져나가게 되고, 유교망국론이 등장하게 된다.

유교는 조선의 건국이념이었고, 중앙집권체제의 기반과 윤리였으나 결국 변질된 예 사상으로 조선멸망의 원인으로 지목되어 비판을 받게 된다.

유명한 소설가 이광수(1892~1950)는 유교는 실제생활에서 동떨어진 허례허문만 숭상했고, 극단적인 형식적 교육에 치우쳐서 조선을 망하게 한 것은 예라고 주장하고, 유림계의 거물 김윤식(1835~1922)조선의 유교는 번문욕례1)로 인해 쇠퇴했다라고 주장한다.

시인 주요한(1900~1979)은 허위, 공상공론의 성행-양반조선의 병폐라고 보았고, 양명학자 정인보(1892~ ? )조선 수백 년간 학문으로는 유학이요, 그 학은 허학 뿐이요, 가행뿐이라고 비판했다.

유교의 삼강오륜과 관혼상제는 허례허식의 대명사로 지목되었고 신채호도 존화주의나 주장하며 완고사상이나 고취하여, 유교확장을 하려는 자는 문명을 위협하는 도적이요, 유교를 파괴하는 도적이라고 수구적 태도를 강하게 비난했다(장석만).

이처럼 유교가 비난받는 점은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예절과 인간의 감정을 억압하고, 또 다른 이유는 관혼상제에서 낭비와 엄청난 지출에 의해 유교의 예절이 고급유희에 지나지 않고, 중화적세계관 때문에 중국은 하나의 민족국가가 아니라, 중심이라고 지칭하는 사대주의만을 조장한다는 관점이다.

 

1) 번잡한 문장과 형식적 의례

또한 조선은 유교적 문치주의를 지향하는 지과위무1)사상을 가지고 문을 높이고 무를 낮춘다는 숭문천무의 사고에 의해 무술적인 활동을 사회적으로 경시되고 유교교육, 무학교육, 기술교육만을 강조하여, 군사학은 중요하게 취급되지 못했다.

이토록 군사조직이 약화되자 자연히 한국전통무예도 방치되어 소멸되어갔을 뿐만 아니라, 고려의 수박희 같은 도수무예도 군사훈련보다는 왕실내부의 화합과 결속을 도모하는 관람용 유희정도로 취부되었다.

이진수는 동양무도연구의 자신의 저서에 한국이나 중국 사람들이 무예·무술이라 하여 전쟁기술이나 싸움법으로만 여기고 있을 때, 일본사람들은 여기에 를 접목시켜 새로운 신체영역을 창조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문치주의의 유교사상이 군사적 목적을 제외한 무예는 조선말엽까지 사장되게 되었고, 그 결과 임진왜란같은 수모와 식민지배체제까지 치닫는 계기로 변한다. 임진왜란이후 조선은 중국의 도수무예인 권법을 도입하지만, 군사무예로만 발전되고 전통무예의 가치는 제대로 인식되지 못한 채 쇠락해 나갔다.

역사적 자료에 의한 약 1,700년간의 전통을 가지며, 우리민족의 자연환경과 삶에 내포되어있던 맨손무술들은 고대국가와 당대사회에 매우 성행하였고, 체계적 분석에 따르면 스스로 자위를 위한 공격과 방어를 하는 기술로 자유자제로 신체활동을 부려 임기웅변의 동작을 하는 것으로 당시 수박의 효과는 신체가 경쾌해지고 동작이 민활해지며, 정신단련에도 큰 도움이 되어 경쟁의 흥미, 기술숙달의 흥미, 인격향상의 흥미, 미적감각의 흥미 등이 일어나는 동시에 수지불식으로 체육성의 효과를 얻게 된다고 했다(심승구).

 

 

 

<6> 한국 도수무예의 특징 (심승구)

첫째







한국의 도수무예는 일찍부터 국가권력에 의해 주도되어 통제되어 왔다.
· 중앙 집권 체제 지향
· 도수무예가 일찍부터 놀이화로 발전된 계기
둘째







한국의 도수무예는 삼국이래로 민과 함께 발전해 나갔다.
· 백성들의 무예 단련의 수단
· 일상 삶속에서 호흡하며 생사고락
셋째







한국의 도수무예는 다양한 도수무예문화를 가지고 있다.
· 권법 - 발기술보다 손기술 위주
· 수박(, 권박) - 손기술보다 발기술 위주
· 시박(신교) - 손기술을 사용하되 씨름적 요소가 가미
· 태껸 - 모든 도수무예의 기술적 체계를 포괄
넷째







한국의 도수무예는 일찍부터 무예와 놀이가 조화되며 발달해왔다.
· 무예능력을 판단하는 수단 내지 창·검류의 보조수단
· 무예적 기능을 상실하면서 유희화, 놀이화

 

고려시대는 무인시대였다. 무도나 무인이 가장 우세한 위치에 있었고 무사들은 많은 특권과 권력을 누렸었다.

하지만 양반관료제의 조선시대에 와서는 문치주의 하에 이루어진 유교교육의 강조로 군사학은 중요하게 취급되지 못했다. 조선의 통치자들은 명예의 소수독점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무신들이 관료의 지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통치자로서의 명예를 나누어 주는데 인색하였다.

조선시대에 서반인 무신들은 동반인 문신들과 동렬을 이루며 양반제도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문신들은 무신들을 차별하여 무신들이 통치자로서의 명예를 갖는 것을 방해하였다. 이를 위해 문신들은 종2품 이상의 무반은 독자적 품계를 갖지 못하도록 해 고위급 무신들은 문반의 품계를 받아야 했다. 또한 무반의 최고 위직인 관직을 문신이 겸임 또는 겸대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병정기관인 병조의 관원도 문신이 독점하였다.

또한 문신들은 의학· 산학· 역학 등을 가르치는 기술학교는 설치하면서도 무신들을 양성하기 위한 무관학교는 설치하지 않았다. 무신들은 무관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병법과 무예에 대한 체계적인 학습이 어려웠고, 스승으로서의 공식적 명예도 가질 수 없었다. 중종대에 관리를 훈련원에 파견하여 무사들을 교육시킬 때에도 교수를 문신으로 파견하였다. 이 때문에 무신들은 무신으로서의 긍지를 갖기 어려웠다. 따라서 무신들 중에는 나라가 태평이라 무신을 버리시니, 나 같은 영웅은 북새에 다 늙거다. 아마도 위국정충은 나뿐인가 하노라고 신세를 한탄하는 이들도 생겨나게 되었다. 이런 관계로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자제들에게 유학을 전문으로 가르쳐 문신으로 진출시키려고 하였다. 이로 인해 무신들의 가문적 전통마저 유지되기 어려워 능력을 갖춘 무신의 배출이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다. 그 결과 무신들의 사기가 떨어져 국방력의 저하를 초래하게 되었다. 아직까지도 이런 뿌리깊은 유교사상은 현재 사회에도 깊은 영향을 끼친다. 지폐만 보더라도 율곡이이, 퇴계이황 등 유학자들만 배경인물로 나오고 역사적 주요 무인들은 거론조차 되지 않는 실정이다.

 

우리가 아직도 당연하게 여기면서 사용할 제의, 의식, 예식, 제례, 제사 등은 사로 연결되면서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예 개념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제기되어야한다. 지금도 태권도 도장에서 수련생들에게 제일먼저 인식시키는 것이 인사하는 방법이며, 예의범절이며 인격수양, 도덕교육이 수련의 목적이다.

 

전통적인 예의와 절도있는 동작, 매너리즘을 배우기 위해 학부모들은 아이들을 태권도장에 보낸다. 태권도장뿐아니라 유사무술인 합기도와 검도도 무조건적인 예의를 첫 번째 수련계획수단으로 본다.

조선은 선비의 나라다라는 대표적인 말이 있듯이 삼강오륜과 관혼상제는 유교의 대명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