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해방 전후 태권도 발생(1944~1950)
1910년 8월29일 한일 합방조약이 공포됨과 동시에, 일제는 서울남산에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은 이성계가 나라를 세운 이래 27대 519년 만에 종말을 고하게 된다.
일본총독은 육해공군과 교육, 철도, 경제, 토지 등 모든 것을 흡수하고 심지어 지방에서 유생들이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던 서당마저 민족의식을 깨우친다며 통제하였다. 이때 우리민족의 고유무술인 태껸이나 수박같은 전통무술은 점차 소멸해갔고, 자연스레 일본 무도영향을 받아 가라테, 유도, 검도의 유입에 길들어져 갔다고 사료된다.
광복을 전후해서 일본에서 유학하던 학생들이 귀국하였고 이들이 가라테의 보급을 서울중심으로 청도관, 조선 연무관, 무덕관, YMCA권법부, 송무관, 등 5개 계파로 정리되었다. 또한 황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일본유학시절 가라테를 배워 해방이 되자 귀국하여 공수도, 당수도1),권법이란명칭으로 도장을 설립하였는데, 각 계파의 설립자와 연혁은 다음과 같다.
1) 가라테, 공수, 당수는 태권도란 명칭이 제정되기 이전 사용되었던 용어로 ‘공수도’로 통일되었으며, 지금 태권도에 비해 손기술을 많이 사용한다. 공수, 당수는 모두 가라테이다. 공수, 당수는 일본어의 훈독체계가 우리나라에서는 음독체계로 일원화 되는데서 생기는 현상이다. 당이건 공이건 그 발음은 모두 ‘가라’이다.(김용옥 1990)
표 8> 5대계파 설립자와 연혁
관명 / 창설자 및 2,3대 관장
1. 청도관 창시자 - 이원국 2대 - 손덕성 3대 - 엄운규
2. 지도관(연무관) 창시자 - 전상섭 2대 - 윤쾌병 3대 - 이종우
3. 무덕관 창시자 - 황기 2대 - 이강익 3대 - 홍종수
4. YMCA권법부(창무관, 강덕원) 창시자 - 윤병인 2대 - 이남석 3대 - 김순배
5. 송무관 창시자 - 노병직
무덕관
황기1)는 해방이 되자 1945년 11월 서울용산역 부근 철도국에 ‘운수부우회 당수도부’를 창설하여 무덕관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는 자신이 1935년 남만주철도국에 인사하여 그때부터 국술을 수련했다고 주장하였다.
초대 무덕관 출신자는 김운창2), 홍종수, 최희석, 유화영, 남산현, 김인식, 이복성, 황진태, 원용범, 정창영, 이강익 등이 있으며 모두다 철도국 직원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무덕관은 전국의 기차역창고에 도장을 개관하면서 관세를 넓혀 나갔다. 1955년 서울역부근 무덕관 중앙본관을 신설하고 전국에 9개 지관을 신설3)하였으며, 기념으로 '한·중 친선 국제 당수도 연무대회'를 개최하였다.
황기는 1953년 대한 당수도 협회를 설립하였으며 1960년 대한 수박도 협회로 개칭하였다. 무덕관은 5대 기간 중 관세가 가장 강했다. 또 협회통합에 반대하는 황기의 고집으로 내분이 일어나 결국 그의 제자인 홍종수와 김영택이 주축이 되어 1965년에 무덕관에서 황기를 제명하고 통합의 뜻을 펼쳤다.
1)황기는 1914년 경기도 장단출생이며 경기상고를 졸업하여 1935년 남만주철도국에 입사, 우연히 중국 무술 고수중 한사람인 양국진을 만나 중국무술을 배웠다(강기석. 2001).
2) 김운창은 무덕관 관번 1번이다.
3) 무덕관의 승급심사때에는 청도관 이원국과 송무관 노병직이 왕례한는 등 교분이 투터웠으나, 단증 및 급증 발급을 놓고 종종 신경전을 벌였다고 한다.
무덕관창설자 황기는 일본의 가라테 출신은 아니지만 중국의 무술과 가라테형을 연구하며 수련생들을 지도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협회통합에 반대와 명칭에 있어서도 당수와 화수, 수박도를 주장하며 타협을 모르는 고집으로 인해 제자들에게 자신이 만든 무덕관 관장직까지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다.
이후 이강익이 관장직을 맡았으나 얼마가지 않고 물러났고 뒤이어 홍종수가 관장이 되었다(1999. 강원식, 이경명).
무덕관은 타관에 비해 많은 유단자를 배출하여서 각관 통합 후에는 홍종수(1969~1970, 1989~1995 대한태권도협회 부회장), 황춘성(1996.전 대한태권도협회부회장), 노우종(1997~1998.전 대한태권도협회전무) 등 요직에 많이 진출하였다.
청도관
청도관은 우리나라 태권도도장의 효시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최초로 가라테를 가르친 이원국은 1944년 9월. 서대문구 옥천동에 있는 연신학교 강당에서 수련을 시작하였으며 ‘당수도 청도관’을 설립하였다.
청도는 청년의 기상과 활동력을 상징하는 푸른파도를 의미하는데 이원국은 19세 때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가 가라테 본관인 쇼토깡에 입문하여 후나코시 기친으로부터 가라테를 배웠다.
광복이후에 귀국한 그는 자신이 배웠던 쇼토깡에서 ‘토’자 한 글자를 빌어와 청도관이란 관명을 만들고 가라테를 보급하였다. 또한 치안국과 친하게 지내며 명동과 서울역일대에 깡패를 단속하는데 앞장섰기 때문에 한때 ‘치안국 도장’이라 불리기도 했다.
전쟁 후 이원국은 친일파로 몰려 일본으로 망명하자 청도관은 손덕성이 맡게 되었으며 수련지도는 유응준과 손덕성이 함께 하였다.
6·25동란 이후, 청도관 관원은 200명 안팎이었는데, 당시 이원국 관장은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도장에 들러 수련모습을 지켜보았고, 승급심사는 6개월에 한 번씩 치러졌다.
주요인물로는 유응준, 손덕성, 엄운규, 현종명, 민운식, 한인숙, 정영택, 강서종, 백준기, 우종림, 남태희, 고재천, 곽근식, 김석규, 한차교, 조성일, 이사만, 이준구, 김봉식 등이 있다.
청도관에서 떨어져 나와 새롭게 설립된 관으로는 강서동이 인천에 설립한 국무관, 이용우가 서울서대문구에 세운 정도관, 고재천이 광주에 설립한 청룡관, 최홍희가 청도관출신의 군인들을 중심으로 오도관을 설립하였다. 초대관장은 이원국, 2대관장은 손덕성, 3대관장은 엄운규였는데 그는 협회구성시기부터 현재까지 대한태권도협회부회장(1961~1962, 64~72, 78~79), 국기원 부원장 등 태권도계의 요직을 두루거치면서 세계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조선연무관(지도관)
유도관이었던 조선연무관에 전상섭이 1946년 3월 3일 ‘조선연무관 공수도부’를 만들어 가라테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그는 학창시절 유도를 배웠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척식대학에서 가라테를 배운 뒤 서울 소곡동에 있던 일본 강도관 조선지부유도회관의 전신에서 무도를 연마했다.
경신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그는 1946년 3월 3일 강도관 조선지부 사범인 이경석의 허락을 받아 도장절반정도에 공수도부 간판을 걸고 관원을 모집했다. 그는 6·25한국전쟁 중에 행방불명이 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 조선연무관의 지도사범이던 윤쾌병1)과 이종우가 지혜로운 길을 뜻한다는 ‘지도관’으로 관명을 개명하여 1968년까지 관을 이끌었다. 윤쾌병은 일본유학시절 병리학을 전공하면서 가라테를 배운 학구파 사범이었는데, 당시 일본가라테 7단으로 한국무도계의 최고수였다.
지도관은 서울에서 태동했지만 전상섭의 친동생 전일섭에 의하여 전라도전주2)에 지관을 개관하면서(1947) 전북지역 군 소재지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지도관은 단계적이고 체계적인 발전을 전북·전주를 중심으로 전일석이 1947년 전북 군산에 지관을 개관한 이례에 전씨들에 의해 군산, 이리, 남원, 정읍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초대관장 전상섭, 2대 윤쾌범 3대 이종우 였다. 지도관의 특징은 겨루기를 중시하였는데 경기화 초기인 1960년대 초부터 1970년대까지 각종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당시 대표적인 경기인들은 이승완, 조점선, 황대진, 최명렬, 등이 있으며 61년 대한 태수도협회 통합과정에서 진통을 겪었는데 당시 이종우는 이남석, 엄운규, 현종명 등과 협회통합을 추진하였고, 윤쾌병은 무덕관 황기와 함께 ‘종신제 최고 심사위원’을 고집하며, 통합에 반대하였다.
지도관의 대표적 태권도인은 배영기, 이종우, 김복남, 박현정, 이수진, 정진영, 이교윤, 이병로, 홍창진, 박영근 등이 있다.
YMCA 권법부 <창무관>
YMCA 권법부는 1946년 윤병인에 의해 창설되었다.
해방 후 경성농업학교에서 체육교사로 제직하면서 무도를 가르친 윤병인은 조선연무관 창설자인 전상섭과 친분이 두터워 조선연무관 공수도부에서 수련하면서 서울종로에 있는 YMCA에 권법부를 창설, 독립을 하였다. 그는 어린 시절 만주로 건너가 중국권법1)을 익힌 인물로서 해방직전에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가라테를 배워 5단을 인정받았다.
일본대학의 가라테사범 도야마 간켄과 무술을 교류하며 친의를 다졌는데 그 당시 일본인을 제치고 일본대학 가라테 주장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전통무도인으로 알려진 윤병인은 한국전쟁 시 행방불명되었다.
그의 제자 이남석은 체신부에 공수도 수련장을 차려 별도로 수련생을 가르치다가 한국전쟁이 끝나자 이남석, 김순배가 창무관으로 명칭을 개명하였다. YMCA 권법부출신으로는 이남석, 홍정표, 박철희, 김순배 등이 있다.
1) 창무관 초대관장 윤병인은 만주의 주한파를 익혔다(강원식, 이경명 2002). 그리고 체구는 외소했지만 혈기가 넘쳐났고, 언행은 과묵했었다. 항상 큼지막한 미국군화를 신고 왼손손가락이 잘려나가 여름에도 흰장갑을 끼고 다녔다.
창무관 수련의 특징은 일본의 당수와 중국권법의 혼합형이라 할 수 있으며, 수련생의 체형에 알맞게 가르쳤다고 한다(하태은 1999).
2대 관장 이남석이 1977년 미국으로 이민을 가고 제 3대 관장에 김순배가 취임하였으나 1978년 관이 완전 폐쇄되자 친목단체로 전락, 창우회 회장으로만 현존하고 있다. 김순배 관장은 대한태권도협회 임원으로 심판부장, 부회장, 국기원 연수원장 등에 임명되어 태권도발전에 기여하였다.
송무관
송무관은 1946년 노병직이 일본유학생활을 청산하고 5월에 개성1)에 정식으로 현판을 내걸고 후진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노병직2)은 일본 유학시절 이원국과 송도관에서 후나코시에게서 가라테를 배웠다. 송무관은 승단심사에 격파를 필수로 하고 수련이 까다로웠는데 해방 후 도장을 서울로 이전하였기 때문에 당시 5대 계보도장중 관세가 가장 약했다.
2대 이영섭, 3대 강원식이 관장으로 명맥을 유지하였다.
송무관의 특징은 주먹과 수도(손날)단련을 중요하게 강조하였으며 모한수련과 모서수련을 실시하였다. 각 계보도장들은 연무시범대회를 해마다 개최. 수련생들이 익힌 위력과 기술을 선보이며 저변확대의 기회로 활용했다. 시범내용은 기본동작, 품새, 격파, 자유대련 위주로 하였다.
송무관 출신들로는 이회순, 이영섭, 김홍빈, 한상민, 이희진, 주규창, 홍영찬, 강원식 등이 있다.
1) 고향인 개성에 돌아온 그는 당시 군사장(활터)이였던 관덕정에서 젊은이들에게 심심풀이삼아 가라테를 가르친 것이 계기가 되었다.
2) 노병직은 단신의 체구에 강인한 인상으로 지나치게 카리스마가 강해 제자들에게 호평을 듣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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