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가 정체성확립이 없이는 나아가야 될 방향 및 세계화 또는 활성화되는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되며 역사성을 의심받고 태권도의 예와 정신이 수련상황과 일치되지 않는 것처럼 매도되기도 한다. 본 연구의 목적은 이러한 태권도의 상황설정에 예와 정신, 그리고 가라테의 유입론, 마지막으로 대구지방 태권도 유입상황을 고찰, 정리하여 정체성 확립에 조금 더 이해시키기 위해 논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조선조 500년 동안 뿌리내려진 유교사상에 길들여져, 여지껏 조선이후 몇 백 번의 침략과 일제식민지를 거치면서도 굳건히 이 유교적 사상을 철학으로 삼고 현재까지 국가이념으로 영향을 크게 받으며 살고 있다. 삼강오륜을 대명사로 여기며 상하가 철저한 일방적 윤리와 질서를 확립하는 지배층의 통치이념으로 국가수호와 체제인정을 위한 최고의 이념이었다. 이런 유교사상이 태권도의 무예사상으로 이어져 태껸이나 수박의 전통을 잇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민간무술문화를 기초로 지금의 경기태권도가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근대이후, 일본식민시절 유학생들에 의해 보급된 가라테의 영향도 인식하고 당연히 인정하고 받아들여야한다. 당시 보급된 가라테를 당수도와 공수도로 불리우며, 많은 사람들이 수련했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민족의 정서인 유교선비사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적 정서와 그 정서를 결정하는 문화전통적 맥락과 일치하였기에 식민시절 감금된 우리정통무예를 되찾는 계기가 되었을 뿐 그 이후 완전히 뿌리내려진 가운데 결국 경기태권도라는 장르를 탄생되는 과정으로 발전된데 기초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대구·경북지방에 태권도가 유입된 상황도 누가 인의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6·25동란이라는 시대적·역사적 상황과 지리적 조건이 일치되어 급속히 발전된 것이다. 본 연구자가 자료에 입각해서 고찰한 대구·경북지방태권도유입에서도 6·25동란과 군이 배경에 들지 않는 상황이 없었다.
무덕관의 홍종수와 지도관의 김정훈, 오도관의 조영희, 청도관의 이종호는 군, 경에 의해 대구에 안착하였고 연무관의 김도기와 창무관의 이동주는 대구의 피난 온 상황이었다.
설립자들의 유입경로는 결국 전쟁과 대구의 지리적위치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의 정착은 각 관들의 공통된 특징인 충효사상과 예의정신 등 유교사상이 베인 윤리적 덕목으로 대구·경북지방 사람들의 기질로 보면 당연히 해야 할 행동철학으로 여겨 빠른 시간내에 급속히 발전된 맨손무예라 할 수 있다.
당시 대구는 해방 후 해외귀환동포의 정착과 6·25동란 시 피난민 등 인구가 급증한 상황이여서 태권도의 보급은 자연발생적이었다고 판단된다. 이와 더불어 대구지방의 특징으로 유림의 핵심인 영남사림(퇴계이황, 남명조식)의 본고장으로 경상도 특유의 보수성이 일치되어 이 두 가지 특징이 조화, 거듭 발전되었다.
결론적으로 근대 태권도보급시기는 다소 극단적 상황(8·15해방, 6·25)에서 이루어졌으며, 어떤 매개체가 도입되었더라도 우리 민족적 사관인 유교선비사상으로 한국 전통무예는 자아완성해왔고 어려운 시기의 지금태권도를 보급, 발전시킨 지금의 원로인 2세대, 3세대들의 노고를 생각해야 된다. 그것이 한국태권도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길이고 태권도가 일류의 도움이 되는 무예로 거듭 발전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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