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역사 (10) 썸네일형 리스트형 근대태권도의 유교적 특징 태권도가 정체성확립이 없이는 나아가야 될 방향 및 세계화 또는 활성화되는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되며 역사성을 의심받고 태권도의 예와 정신이 수련상황과 일치되지 않는 것처럼 매도되기도 한다. 본 연구의 목적은 이러한 태권도의 상황설정에 예와 정신, 그리고 가라테의 유입론, 마지막으로 대구지방 태권도 유입상황을 고찰, 정리하여 정체성 확립에 조금 더 이해시키기 위해 논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조선조 500년 동안 뿌리내려진 유교사상에 길들여져, 여지껏 조선이후 몇 백 번의 침략과 일제식민지를 거치면서도 굳건히 이 유교적 사상을 철학으로 삼고 현재까지 국가이념으로 영향을 크게 받으며 살고 있다. 삼강오륜을 대명사로 여기며 상하가 철저한 일방적 윤리와 질서를 확립하는 지배층의 통치이념으로 국가수호와 체제인정을 위한.. 지도관 근대 대구태권도의 역사 지도관은 연무관처럼 형(품새) 중심이 아닌 대련(겨루기) 위주의 수련방식을 선호했었다. 대구·경북에 지도관을 처음 개설한 관장은 김정훈 관장이다. 그는 스승인 윤쾌병 관장의 사사를 받아 무도정신이 투철했는데 서울 태생인 김정훈 관장은 6·25 전쟁을 계기로 대구에 주둔해 있던 헌병사령부에 근무하면서 대구와 인연을 맺게 된다. 군복무를 마친 뒤 그는 서울로 올라가지 않고55년 10월 1일 대구 수창초등강당에서 지도관 경북 본관을 설립, 지도관 핵심인 일격필살을 교훈삼아 대구·경북·경기태권도의 한 획을 긋게 된다. 초창기 지도관은 윤쾌병 관장의 반대로 대한 태권도협회에 가입치 않아서 공식적인 대회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지도관 본관이 주최하는 ‘전국공수도대회’를 열어 검도 시합 때 쓰는 호구복으로 얼굴과 몸.. 청도관 근대 대구태권도의 역사 대구에 처음 청도관의 뿌리를 내린 사람은 이종호 관장이다. 그는 51년 해군에 입대하여 함대사령부 산하 63함에 근무하면서 박기웅 사범을 만난다. 박기웅 사범은 창무관 지관을 민간인 상대로 태권도를 보급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제대할 때까지2단의 단증을 획득하였다. 제대 후 서울견지동 청도관 본관에 입문한 이종호 관장은 일 년 남짓 서울에 있는 동안 청도관 2대 관장 손덕성으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또한 대구·경북의 청도관 기틀을 마련하는데 56년 대구에 청도관 경북본관을 개설한 후 청도관 개관기념 키네마(한일극장)에서 청도관 중앙 본관 및 경북 본관 합동 연무시범을 개최했다. 그리고 50년대 말 ~ 60년대로(사회사업대, 현 대구대) 한성상고, 대구상고, 하양 무학중 등 학교팀 창단에 앞장서 세력을 확장한다.. 창무관 YMCA서울 중앙 기독교 청년회 초대 경북·대구 태권도 관장에 오른 이동주 관장(75년작고)과 중앙관장을 지낸 이남석 관장은 윤병인(초대 창무관 중앙관장 6.25전쟁당시 납북 추측)선생을 도와 46년 9월 서울 중앙기독교 청년회 체육부에 태권도부를 창설한다. 곧 체신부와 경동중·고, 성균관대 등에 태권도부를 잇다라 설립을 하며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지만, 6·25가 발발. 사범, 수련생모두가 흩어진다. 소설같은 이야기지만 이동주관장은 인민군에 잡혀 강제징집 또는 부역에 종사하다 연합군에 의해 북한군 포로로 분류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되지만 경비병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탈주에 성공하였다. 이동주 관장은 낮선 대구로 와서 삶에 익숙해지자, 대구 중구 동인동에 있던 연탄공장을 빌려 창무관 대구·경북본관을 설립을 하게 되었다. 그 .. 연무관 연무관 연무관 창설자인 김도기(160cm정도의 키에 60kg에 못 미치는 체구를 가졌지만, 격파의 달인이라 불리어지고 절에서 스님 으로부터 무술을 익혔다고 추측. 연무관 본 관장을 맡으면서 옥포 용연사를 자주방문) 관장(72년 작고)은 태권도 당수도의 격파부분의 제 1인자로 뽑혔었다. 고향이 평양인 그는 6·25전쟁으로 대구 중구 서야동에 연무관을 하대영 관장(경남 창녕)과 설립했다. 김도기 관장은 대구·경북 중심으로 활동한 반면, 하대영 관장은 부산·경남 태권도 보급에 중심이었다. 연무관 특징은 무술대회를 개최. 시범을 많이 활성화 시켰는데 그 당시 놀이나 오락문화가 없어서인지 연무시범은 최고의 인기를 누렸었다. 주로 학교운동장이나 극장무대가 활동 장소였는데 1959년도에는 연무관본관에 수련생 1천명이.. 근대태권도 대구 무덕관 무덕관 해방 후 대구·경북지역의 태권도 보급은 1953년 홍종수1) 관장으로부터 비롯됐다. 홍종수는 서울출생의 당수 2단, 50년 6·25가 발발한 후 철도경찰에 입대하고 지리산 무장공비소탕작전 등 전 투에 참가하였으며 58년 경찰 퇴직을 명받는다. 그는 6·25 당시 교통부 철도 경찰로 근무 하다가 휴전이 되면서 경북 경찰국으로 발령이 나서 수사과에 근무하였다(당시 대구는 6·25 동란으로 인해 피난민이 급증, 치안상태가 전국 최악이었다). 홍종수 관장이 무덕관과 인연을 맺은 것은 해방직후 1945년 일제시대를 만주에서 보내고 귀국한 뒤 미군정 운수부에 취직하였는데, 그때 황기선생이 당수도부(무덕관)을 창단, 그의 제자로 입문하였다. 50년 6·25 가 발발하자 철도경찰에 입대, 전투에 참가하면서도 빈.. 대구지역 태권도 역사 대구는 가까이 낙동강과 접하고 금호강이 흘러 수로교통이 편리한 지역이고 북방에서 남하해오는 이주민들이 이동할 때 거쳐야하는 하나의 결절지를 이루어서 일찍부터 육상교통도 상당히 발달하였다. 이러한 지리적, 위치적 장점으로 인해 대구지방에 태권도의 유입이 자연스러웠다고 할 수 있다. 태권도뿐만 아니라 국내 합기도의 도주인 최용술도 출발은 대구에서부터였다. 그는 1913년 일본에서 무전총각(다케다 소우가쿠)의 문하에 들어가 대동류 최고의 기법을 배우고 난 후,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귀국하게 되었으나, 부산항을 통해 고향인 충북 황간으로 돌아가던 중, 짐가방을 분실하고 여비가 떨어져 정착한 곳이 대구이다. 그는 대구양조장(현, 대구달성동 달성공원 앞)에서 한국최초 합기도장 ‘대한합기유권술’을 열어 전파하기 .. 한국전쟁 이후 태권도 발달(1950~1978) 50년대에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는 기점으로 초기 5대관들에게 지각변동이 일어난다. 행방불명 또는 일본으로 밀항하는 등 혼란기가 일어나고 각 관들의 제자들이 뜻이 서로 맞지 않아 새로운 관이 설립된다. 오도관 무도인이자 청도관 출신인 ‘최홍희’는 국군을 창설한 한사람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얻고 있었으며, 청도관 설립자인 이원국이 일본으로 도피하면서 청도관 명예 관장직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청도관 출신들을 군에 많이 입대시켰다. 그들이 주축이 되어 군대에서 오도관을 창설하였다. 1953년 9월 ‘익크부대1)’에 당수도 2단 남태희중위2)와 당수도 1급인 한차교 하사를 훈련소 사범으로 임명하여 태권도를 보급, 자신이 사단장으로 있는 국군29사단을 단시일에 강군으로 만들고, 54년 6월 제주도를 떠나..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