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무관 YMCA서울 중앙 기독교 청년회
초대 경북·대구 태권도 관장에 오른 이동주 관장(75년작고)과 중앙관장을 지낸 이남석 관장은 윤병인(초대 창무관 중앙관장 6.25전쟁당시 납북 추측)선생을 도와 46년 9월 서울 중앙기독교 청년회<YMCA> 체육부에 태권도부를 창설한다. 곧 체신부와 경동중·고, 성균관대 등에 태권도부를 잇다라 설립을 하며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지만, 6·25가 발발. 사범, 수련생모두가 흩어진다.
소설같은 이야기지만 이동주관장은 인민군에 잡혀 강제징집 또는 부역에 종사하다 연합군에 의해 북한군 포로로 분류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되지만 경비병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탈주에 성공하였다.
이동주 관장은 낮선 대구로 와서 삶에 익숙해지자, 대구 중구 동인동에 있던 연탄공장을 빌려 창무관 대구·경북본관을 설립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 무도지도자로서 흔치않는 일본메이지대학 상대를 졸업한 탓에 지도 방법도 남달랐다고 한다. 1시간 수련 뒤에 반드시 20여분 정도의 정신교육과 예절, 도덕교육을 중점적으로 하며 서예솜씨가 뛰어나 태권도 주요행사 때 상장작업등을 도맡아 작성하였다.
창무관 경북본관은 50년 말 대구지역 남부도장(김영종), 중부도장(김춘만), 팔군도장(구목회(87년 미국으로 도피, 현재 미국 워싱턴에서 태권도 보급에 활동)) 등과 경산도장을 포함 7개정도의 지부를 갖췄지만 성장하지 못하고 오히려 쇠퇴하였다. 당시 타 관의 경우에는 3단 수련경력을 가지면 지부도장을 개설할 수 있었지만 창무관 이동주관장은 도장개설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동주 관장이 75년에 작고하면서 서익수가 취임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이동주관장의 제자이지만 태권도인이 아닌 사업가였다. 창무관의 경영난 때문에 추대된 그는 77년 구목회 사범에게 3대 관장직을 넘겨주었다.
구목회 관장은 50년대 말부터 주로 미8군(캠프 헨리, 캠프워커)에서 태권도지도를 해왔었다. 70년대 말부터 세력에 안정을 취한 창무관은 대구에는 이영호1), 3년후 정연덕2) 관장이 경북을 나눠 관리를 했으며 이런 시련기를 거치며 천삼수3)(전, 대구태권도협회 전무), 김중범(대구도장), 이정호(경북태권도협회 심사분과 위원장), 정연덕 관장 등이 창무관 중심역할을 했었다.
조증덕, 박찬명(작고, 영주한국도장), 조태현(안동도장), 윤웅일4)(전, 경북태권도협회 부회장), 윤종욱5) 관장이 창무관 출신자로서 윤웅일관장과 윤종욱은 경북태권도를 국내 정상으로 견인을 했으며 76년 경북체고 태권도부 창단으로 문종국, 장질환, 이창건, 장윤정, 임성욱 등 국가대표와 전국대회 우승의 영광을 차지하기도 했었다.
1)전, 대구태권도협회 부회장
2)전, 경북태권도협회 기술심의회의장.
3)전, 태권도협회 전무.
4)전, 경북태권도협회 부회장.
5)76년 경북체고 태권도부 창단. 54회 전국체전 출전. 56회 전국체전 일반부 핀급 금메달. 제 2회 아시아 선수권 플라이급 2위. 57회 전국체전 플라이급 동메달. 58회 전국체전 일반부 금메달 등.
현, 경북태권도협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