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지역 태권도 역사
대구는 가까이 낙동강과 접하고 금호강이 흘러 수로교통이 편리한 지역이고 북방에서 남하해오는 이주민들이 이동할 때 거쳐야하는 하나의 결절지를 이루어서 일찍부터 육상교통도 상당히 발달하였다. 이러한 지리적, 위치적 장점으로 인해 대구지방에 태권도의 유입이 자연스러웠다고 할 수 있다. 태권도뿐만 아니라 국내 합기도의 도주인 최용술도 출발은 대구에서부터였다. 그는 1913년 일본에서 무전총각(다케다 소우가쿠)의 문하에 들어가 대동류 최고의 기법을 배우고 난 후,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귀국하게 되었으나, 부산항을 통해 고향인 충북 황간으로 돌아가던 중, 짐가방을 분실하고 여비가 떨어져 정착한 곳이 대구이다. 그는 대구양조장(현, 대구달성동 달성공원 앞)에서 한국최초 합기도장 ‘대한합기유권술’을 열어 전파하기 시작해서 경북 경남으로 계보를 이어갔다(박철희. 2005)
해방 전후(1940~50) 대구지방의 전통무술문헌자료와 외래무술도입자료가 너무 미미하여서 뿌리를 내리진 못한 것 같으나 한국전쟁(6·25)로 인해 대구지방 태권도는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는 시점으로 인해 전국각지의 피난민들이 대구로 유입하는 가운데 5대 기간도장 설립자의 1세대 제자들과 후배들이 대거 피신처로 대구로 유입해서 관을 설립하고 발전시킨 것이 대구경북지방태권도의 시발점이다.
대구·경북태권도가 오늘날과 같이 발전되게 된 것은 전쟁직후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설립자들의 무도정신과 지금은(2007) 대구·경북태권도계의 원로로 있는 2세대, 3세대들의 희생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태권도가 어떻게 대구·경북지방에 보급되었고 설립, 발전되었는지 알아보고, 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 포고령제6호 ‘유사단체 통합방침’ 전·후를 기점으로 각 5대 기간을 계파별로 정리해보았다.
중앙관 | 대구·경북관 | |
무덕관 | 창시자 - 황기 2대 - 이강익 |
1대 - 홍종수(중앙관3대) 2대 - 지상섭 3대 - 최남도(중앙관4,5,6,7대) |
청도관 | 창시자 - 이원국 2대 - 손덕성 3대 - 엄운규 |
이종호 |
창무관 | 창시자 - 윤병인 2대 - 이남석 3대 - 김순배 |
1대 - 이동주 2대 - 서익수 |
지도관 | 창시자 - 전상섭 1대 - 윤쾌병 2대 - 이종우 |
김정훈 |
오도관 | 창시자 - 최홍희 | 1대 - 조영희 3대 - 박동찬 |
연무관 | 창시자 - 하대영 | 김도기 |
(자료출처 : 대구 매일신문. 1996. 1. 16 향토체육의 맥.편)